앵커: 국제사회와 가족들의 거듭된 호소에도 중국 내 탈북민에 대한 강제 북송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북한에 송환된 것으로 알려진 탈북민 김철옥 씨의 언니 김규리 씨는 자유아시아방송에 “20년 넘게 중국에서 살아 북한 말을 할 줄 모르는 동생이 심한 구타를 당할까 봐 두렵다”면서 “다시 남편, 딸과 함께 살 수 있게만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서혜준 기자가 북송된 김철옥 씨의 언니 김규리 씨와 통화했습니다.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김규리] 저에게 안 와도 돼요.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만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다른 바람이 없어요. 언니 곁으로 안 와도 됩니다.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만, 중국에서 제발 좀 받아줘서 딸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만 하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것뿐이에요.
지난 10월 9일 강제 북송된 것으로 알려진 탈북민 김철옥 씨의 친언니 김규리 씨.
그는 지난 24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전화 통화 내내 오열했습니다.
김 씨는 북송된 후 소식이 끊긴 동생이 혹시나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 등으로 목숨을 잃지 않을까란 걱정에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발 때리지만 말아달라”는 울음 섞인 호소가 수화기 너머로 간절하게 들려왔습니다.
[김규리] 저희 오빠가 감옥에서 맞아 죽었어요. 무덤도 없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게 감옥에서 맞아 죽었거든요. 동생도 오빠처럼 똑같이 그렇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워요. 제발 때리지만 말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만 해주세요. 그것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폐막한 직후인 지난 9일 밤, 수백 명의 탈북민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을 때 탈북민 김철옥 씨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난 4월 중국 공안에 붙잡혀 구금 생활을 하던 중 “곧 북한에 넘어간다”는 짧은 통화를 끝으로 김철옥 씨의 소식은 끊겼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던 1998년, 김철옥 씨는 일 년 먼저 탈북한 언니를 찾아 강을 건넜습니다. 언니인 김규리 씨도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인신매매 피해자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동생(김철옥)의 나이는 고작 14살, 브로커를 통해 언니와 연락이 닿았지만, 곧바로 30살이나 많은 시골 남자에게 팔려 가게 됩니다.
[김규리] 내가 내일 몇 시쯤 거기에 도착할 테니 제발 내 동생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리고 두 시간 뒤에 다시 전화했는데, 그 사이에 동생을 팔아버린 거예요. 14살짜리를... 제가 계속 끊임없이 전화했어요. “동생을 어디다 팔았는지, 어디로 보냈는지만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끊어버리면서 그렇게 연락이 두절된 거예요. 그때부터 동생을 잃어버렸죠. 찾을 길이 없으니까.

김 씨가 헤어진 동생을 다시 찾은 건 지난 2020년, 동생과 소식이 끊긴 지 무려 23년 만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동생은 20살이 넘은 아이의 엄마가 돼 있었습니다. 합법적 신분이 없는 탈북민이다 보니 중국 공안에 정기적으로 뇌물을 주며 숨어 살았고, 20년 넘게 중국어만 쓰다 보니 북한 말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김규리] 그때 당시 애가 21살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몇 살에 애를 낳았냐?”고 물었더니 15살에 애를 낳았더라고요. 팔려 가서 바로 애를 가진 거예요. 14살에 애를 가져서 15살에 애를 낳았더라고요. 그 남편이란 사람이 저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지금은 70세가 다 되어 가는데, 30살 어린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데리고 살면서 애를 갖고, 너무 짐승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미워했어요.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자주 영상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틈틈이 한국말도 가르쳤습니다.
김 씨는 당장 동생을 곁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코로나 대유행으로 모든 구출 활동이 막히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정작 동생도 탈출을 주저하다가 올해 초 언니 곁으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김규리] 올해 1월에 동생이 코로나에 걸렸어요. 집에서 시름시름 앓았죠. 신분이 없으니까 백신 한 번 못 맞고, 약도 없고, 병원도 못 가고 그냥 집에서 앓았더라고요. 그때 동생이 결심한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못 살겠구나. 앞으로 내가 아프면 그냥 죽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대요. 그래서 “언니, 나 사람 찾아서 데리고 가줘” 이렇게 된 거예요.
김 씨는 곧바로 중국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올 사람을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그사이 한 구출 단체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가 그 길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지난 4월의 일이었습니다.
[김규리] 출발했다는 건 아는데, 열흘 동안 소식이 없는 거예요. 보통 일주일이면 태국에 도착하거든요. 태국에 도착하면 브로커를 통해서 연락이 와요. 그런데 열흘이 돼도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에 있는 동생의 딸이 저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엄마가 잡혔다”고...
전화 통화로 “안전하게 오길 바란다”고 말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중국 공안에 붙잡힌 겁니다. 23년 전과 똑같이 동생을 잃어버린, 질긴 악연의 두 시간이었습니다.
동생 구출 위해 동분서주 … 결국 북송 소식에 눈물만
중국 공안에 동생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김 씨는 그때부터 동생을 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유엔사무소와 한국 영사관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고,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 인권특별보고관을 만나 “이대로 동생이 북송되면 죽는다. 북한 말을 몰라 맞아 죽을 수 있다”며 “제발 도와달라”는 하소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중국에 있는 조카가 세 번이나 동생 면회를 갔지만, 한 번도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9일에 전해진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김규리] 갑자기 동생의 딸에게서 또 연락이 와서 조금 전 엄마와 직접 통화했다면서 “엄마가 2시간 뒤에 북송된대”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엄마랑 통화했냐”고 물어보니까 동생이 아마 경찰에게 “딸하고 한 번만 전화 통화하게 해달라, 제발 도와달라”고 했나 봐요. 그 경찰도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통화하라고 알려줬대요. 그렇게 (딸이) 엄마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거예요. “어디로 넘어간다”는 말만 하고…, 그리고 또 연락이 끊긴 거죠. 그리고 넘어간 거죠.
김 씨는 거듭된 호소와 요청에도 탈북민의 강제 송환을 막지 못한 유엔과 국제사회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김규리] 우리는 유엔에서 답이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동생이 북송됐다고 하면서 많이 알려지니까 그제야 유엔이 저희에게 답을 줬어요. “아니 왜 답을 이제야 주냐. 이미 동생은 넘어갔는데…”
이제 김 씨에게는 한 가지 바람밖에 없습니다.
북송된 동생이 북한에서 제발 무사하기를, 다시 남편과 딸이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김규리] 저는 너무 속상한 게, 북한보다 중국에서 더 오래 살았잖아요. 중국에 가족도 있고 딸도 있고, 이제 손주까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보낼 수가 있는지.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갈라놓을 수 있는지. “제발 그냥 가족에게 돌아가게만 해달라” 그걸 원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안 들어줬어요.
김 씨는 지금도 동생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또다시 탈북민에 대한 강제 송환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제 북송된 동생 김철옥 씨와 언니 김규리 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서혜준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