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된 내 동생, 제발 보내주세요”

0:00 / 0:00

앵커: 국제사회와 가족들의 거듭된 호소에도 중국 내 탈북민에 대한 강제 북송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북한에 송환된 것으로 알려진 탈북민 김철옥 씨의 언니 김규리 씨는 자유아시아방송에 “20년 넘게 중국에서 살아 북한 말을 할 줄 모르는 동생이 심한 구타를 당할까 봐 두렵다”면서 “다시 남편, 딸과 함께 살 수 있게만 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서혜준 기자가 북송된 김철옥 씨의 언니 김규리 씨와 통화했습니다.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김규리] 저에게 안 와도 돼요.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만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다른 바람이 없어요. 언니 곁으로 안 와도 됩니다.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만, 중국에서 제발 좀 받아줘서 딸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만 하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것뿐이에요.

지난 10월 9일 강제 북송된 것으로 알려진 탈북민 김철옥 씨의 친언니 김규리 씨.

그는 지난 24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전화 통화 내내 오열했습니다.

“북송 된 내 동생, 제발 보내주세요” “북송 된 내 동생, 제발 보내주세요”

김 씨는 북송된 후 소식이 끊긴 동생이 혹시나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 등으로 목숨을 잃지 않을까란 걱정에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발 때리지만 말아달라”는 울음 섞인 호소가 수화기 너머로 간절하게 들려왔습니다.

[김규리] 저희 오빠가 감옥에서 맞아 죽었어요. 무덤도 없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게 감옥에서 맞아 죽었거든요. 동생도 오빠처럼 똑같이 그렇게 될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워요. 제발 때리지만 말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만 해주세요. 그것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폐막한 직후인 지난 9일 밤, 수백 명의 탈북민이 비밀리에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을 때 탈북민 김철옥 씨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난 4월 중국 공안에 붙잡혀 구금 생활을 하던 중 “곧 북한에 넘어간다”는 짧은 통화를 끝으로 김철옥 씨의 소식은 끊겼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던 1998년, 김철옥 씨는 일 년 먼저 탈북한 언니를 찾아 강을 건넜습니다. 언니인 김규리 씨도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인신매매 피해자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동생(김철옥)의 나이는 고작 14살, 브로커를 통해 언니와 연락이 닿았지만, 곧바로 30살이나 많은 시골 남자에게 팔려 가게 됩니다.

[김규리] 내가 내일 몇 시쯤 거기에 도착할 테니 제발 내 동생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리고 두 시간 뒤에 다시 전화했는데, 그 사이에 동생을 팔아버린 거예요. 14살짜리를... 제가 계속 끊임없이 전화했어요. “동생을 어디다 팔았는지, 어디로 보냈는지만 알려달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끊어버리면서 그렇게 연락이 두절된 거예요. 그때부터 동생을 잃어버렸죠. 찾을 길이 없으니까.

2.jpg
어린 시절 김철옥 씨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찍은 사진. / 김규리 씨 제공

김 씨가 헤어진 동생을 다시 찾은 건 지난 2020년, 동생과 소식이 끊긴 지 무려 23년 만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동생은 20살이 넘은 아이의 엄마가 돼 있었습니다. 합법적 신분이 없는 탈북민이다 보니 중국 공안에 정기적으로 뇌물을 주며 숨어 살았고, 20년 넘게 중국어만 쓰다 보니 북한 말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김규리] 그때 당시 애가 21살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몇 살에 애를 낳았냐?”고 물었더니 15살에 애를 낳았더라고요. 팔려 가서 바로 애를 가진 거예요. 14살에 애를 가져서 15살에 애를 낳았더라고요. 그 남편이란 사람이 저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지금은 70세가 다 되어 가는데, 30살 어린 그 어린아이를 그렇게 데리고 살면서 애를 갖고, 너무 짐승처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미워했어요.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자주 영상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틈틈이 한국말도 가르쳤습니다.

김 씨는 당장 동생을 곁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코로나 대유행으로 모든 구출 활동이 막히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정작 동생도 탈출을 주저하다가 올해 초 언니 곁으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김규리] 올해 1월에 동생이 코로나에 걸렸어요. 집에서 시름시름 앓았죠. 신분이 없으니까 백신 한 번 못 맞고, 약도 없고, 병원도 못 가고 그냥 집에서 앓았더라고요. 그때 동생이 결심한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못 살겠구나. 앞으로 내가 아프면 그냥 죽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대요. 그래서 “언니, 나 사람 찾아서 데리고 가줘” 이렇게 된 거예요.

김 씨는 곧바로 중국에서 동생을 데리고 나올 사람을 수소문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그사이 한 구출 단체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가 그 길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지난 4월의 일이었습니다.

[김규리] 출발했다는 건 아는데, 열흘 동안 소식이 없는 거예요. 보통 일주일이면 태국에 도착하거든요. 태국에 도착하면 브로커를 통해서 연락이 와요. 그런데 열흘이 돼도 소식이 없어서 “어떻게 된 거지?” 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에 있는 동생의 딸이 저에게 연락이 온 거예요. “엄마가 잡혔다”고...

전화 통화로 “안전하게 오길 바란다”고 말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중국 공안에 붙잡힌 겁니다. 23년 전과 똑같이 동생을 잃어버린, 질긴 악연의 두 시간이었습니다.

동생 구출 위해 동분서주 … 결국 북송 소식에 눈물만

중국 공안에 동생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김 씨는 그때부터 동생을 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유엔사무소와 한국 영사관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고, 엘리자베스 살몬 유엔 북한 인권특별보고관을 만나 “이대로 동생이 북송되면 죽는다. 북한 말을 몰라 맞아 죽을 수 있다”며 “제발 도와달라”는 하소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중국에 있는 조카가 세 번이나 동생 면회를 갔지만, 한 번도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9일에 전해진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김규리] 갑자기 동생의 딸에게서 또 연락이 와서 조금 전 엄마와 직접 통화했다면서 “엄마가 2시간 뒤에 북송된대”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엄마랑 통화했냐”고 물어보니까 동생이 아마 경찰에게 “딸하고 한 번만 전화 통화하게 해달라, 제발 도와달라”고 했나 봐요. 그 경찰도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통화하라고 알려줬대요. 그렇게 (딸이) 엄마와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거예요. “어디로 넘어간다”는 말만 하고…, 그리고 또 연락이 끊긴 거죠. 그리고 넘어간 거죠.

김 씨는 거듭된 호소와 요청에도 탈북민의 강제 송환을 막지 못한 유엔과 국제사회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김규리] 우리는 유엔에서 답이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동생이 북송됐다고 하면서 많이 알려지니까 그제야 유엔이 저희에게 답을 줬어요. “아니 왜 답을 이제야 주냐. 이미 동생은 넘어갔는데…”

이제 김 씨에게는 한 가지 바람밖에 없습니다.

북송된 동생이 북한에서 제발 무사하기를, 다시 남편과 딸이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김규리] 저는 너무 속상한 게, 북한보다 중국에서 더 오래 살았잖아요. 중국에 가족도 있고 딸도 있고, 이제 손주까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보낼 수가 있는지.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갈라놓을 수 있는지. “제발 그냥 가족에게 돌아가게만 해달라” 그걸 원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도 안 들어줬어요.

김 씨는 지금도 동생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또다시 탈북민에 대한 강제 송환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제 북송된 동생 김철옥 씨와 언니 김규리 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서혜준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